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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상가, 비를 피하던 길이 상권이 된 이야기

by 브랜딩미 2025. 8. 13.

도심 속에서 일상적으로 지나치게 되는 지하상가.

오늘은 어떻게 지하상가가 등장하고 상권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해보려고 한다.

 

지하상가, 비를 피하던 길이 상권이 된 이야기
지하상가, 비를 피하던 길이 상권이 된 이야기

비를 피하는 지하 통로의 등장 

   
오늘날 도심의 지하상가를 걸으면 수십, 수백 개의 상점과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그 시작은 매우 단순했다. ‘비를 피하고 도로를 안전하게 건너기 위한 통로’였다.
1960~70년대, 한국의 대도시는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증가로 인해 교통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시 도로 횡단보도만으로는 사람들의 이동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어려웠고, 비나 눈이 오면 우산 행렬이 교차로마다 뒤엉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도(地下道)가 속속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길을 건너는 통로였기에, 벽면은 회색 시멘트 그대로였고, 조명도 희미했다. 그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뜨거운 여름에도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는 장점 덕분에,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지하도를 자주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형 백화점이나 기차역, 버스터미널과 연결된 지하도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갔다. 출퇴근길, 장바구니를 든 주부, 아이 손을 잡은 부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다니면서, ‘여기서 뭔가 팔면 잘 팔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하도에서 지하상가로, 변신의 순간

 

지하도가 상업 공간으로 변한 결정적 계기는 경제 성장과 소비 문화의 변화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월급을 받는 직장인과 소비 여력이 생긴 가정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고, 상인들은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를 원했다. 지하도는 이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초창기 지하상가는 허가받은 노점 형태로 시작했다. 매대를 간단히 설치하고, 양말·넥타이·헤어핀·우산 같은 소품을 팔았다. 장마철이면 우산이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겨울이면 목도리와 장갑이 인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하상가는 점점 체계화되었다. 바닥 타일이 깔리고, 조명이 밝아졌으며, 환기 시설과 간이 화장실까지 갖추게 됐다. 매대 대신 작은 점포가 줄지어 들어서고, 간판이 걸리면서 ‘지하도’라는 이름보다 ‘지하상가’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정부와 지자체도 상권 활성화를 위해 나섰다. 서울의 을지로·명동, 부산의 서면, 대구의 동성로 등 주요 도심에는 대규모 지하상가가 조성됐다. 백화점과 연결된 복합 쇼핑 지하상가는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손님을 확보했고, 이곳에서 창업한 상인들은 ‘평생 직장’으로 삼을 정도였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지하상가의 의미


1970~90년대 지하상가는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도시인의 생활 문화 공간이었다. 주말이면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고, 학생들은 친구와 군것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들은 생필품을 저렴하게 사기 위해 지하상가를 찾았고, 아이들은 장난감과 문구점 앞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당시 지하상가에는 거리 예술가와 음악가들도 종종 등장했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청년,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손글씨로 이름을 새겨주는 장인 등이 있었다. 이 작은 지하 공간은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뒤섞이는 ‘작은 사회’였다.

또한 지하상가는 경제적인 의미도 컸다.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덕분에, 장사가 꾸준히 이어졌고,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안정적인 생계 기반이 되었다. 일부 상인은 20~30년간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으며 ‘단골 문화’를 만들었다. 손님도 상인도 서로 이름을 알고, 가족사까지 공유하는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됐다.

오늘날 지하상가는 대형 쇼핑몰과 온라인 쇼핑의 등장으로 예전만큼 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출퇴근길을 오가는 직장인, 날씨 걱정 없이 쇼핑하려는 시민, 그리고 과거의 추억을 간직한 세대에게 특별한 장소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비를 피하던 단순한 통로가 어떻게 도시의 상업 심장부로 변했는지에 대한 역사와 이야기가 살아 있다.

 


지하상가는 단순한 상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와 도시인의 삶을 그대로 담아낸 생활사 박물관이다. 교통과 안전이라는 필요에서 시작해,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한 이 공간은, 여전히 도심 속에서 조용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맞이하고 있다. 앞으로 지하상가가 어떻게 변화하든, 그 뿌리에는 ‘비를 피하던 지하 통로’라는 소박한 시작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